주관과 확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을 살짝 부러워해왔다. 난 이 세상에서 정말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되는지 줄곧 의심하면서 살아왔는데, A는 A고 B는 B라고 명쾌하게 결론내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가 생각이 부족하고 게으르다는 자책감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건 그냥 성격이 그렇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고등학생 때 제일 두려웠던 건 내 눈앞에 있는 게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거였고, 내 존재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건지 한동안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가 철학교과서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하니까 존재한다는 문장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아 그런가 싶으면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왜 꿈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생각하지만 막상 깨고 나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그런 일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하고. 수능 때문에 고민은 접었지만, 현실과 진실과 거짓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은 계속됐다.

그런 면에서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이런 공포감을 헤집는 호러소설과 비슷하다. 친구들이 어쩐지 범접할 수 없었던 에이드리언은 언제나 확신을 주저하고, 이유도 없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젊은 치기로 자신만만했던 친구들 중 하나인 화자는 나이가 들어서야 조금씩 자신의 눈에 비쳤던 것들이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시점에서 에이드리언이 남긴 일기장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된다. 일기장은 자신의 두려움과 불확신을 좀더 선명한 무언가로 바꿔줄 수 있는 열쇠다. 인상깊은 몇 구절은 아래에.

-예를 들면, 우리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부단히 기록-말로, 소리로, 사진으로-을 남겨두었다 해도, 어쩌면 그 기록의 방식은 엉뚱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살아남은 우리-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그것이 에이드리언의 글이 내 안에서 촉발시킨 물음이었다. 나의 삶에 더해진 것과 뺀 것은 있었지만 곱해진 것은? 그 생각에 이르자 나는 심란하고 불안해졌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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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가 추석 다음날 아침 7시 20분에 일어나서 잠이 안 오길래 9시까지 책을 읽으면서 무려 아이폰으로 끄적인 부분. 그러다가 이날의 일과를 마치고 오후부터 다시 얼마 안 남은 분량을 뒤적이기 시작했는데, 이 요망한 소설이....주인공이 엄청난 반전을 겪고 충격에 빠졌는데 정작 나는 뭔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는 거다. 앞뒤로 다시 읽어가면서 일단 파악은 했는데 그런 결말의 개연성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겠다.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차라리 중간에 주인공이 생각했던 것처럼 에이드리언이 '유모차를 끄는 지겨운 삶'이 끔찍해 자살한 걸로 해버리는 게 더 나을 듯도 싶고.

어쨌든 과연 띠지에 인용된 문구들처럼 다시 한번 처음부터 읽게 만드는 건 확실하다. 나도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이지만, 위에 끄적인 생각들은 아마 그대로일 듯하다. 에이드리언은 내 두려움을 보다 지적이면서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가상의 인물이라 반가웠다.

그리고 명쾌한 확신에 대해서는...

근처에 말과 글로 벌어먹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각자의 주장과 의견도 너무너무 선명하다. 그런데 명쾌한 사람들이 명쾌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진실에 가깝느냐, 고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보니 자존감 낮은 사람들보다는 행복하겠다 싶긴 한데 그게 또 조금만 삐끗하면.
난 애초에 게으르기도 하고, 애써 단정짓느니 그냥 계속 의심하고 살 것 같다. 그냥 의심만 하면 없어 보이니까 신중함으로 포장해 가면서....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