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시험 때면 영화든 소설이든 목이 마르기 마련.
아래 기사를 읽고 뭔가 칠팔십년대틱한 제목의 <고래>를 집어들었다가 재미있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지 가슴 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웃기는 듯 싶었더니 잔인할 만큼 처절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귀찮게 끄적여대는 듯 보이더니, 무엇보다도 뜨겁고 열정적이었다.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14> 천명관, 한국문학의 경계를 위협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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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소설이란 장르가 뿌리내린 이래 한 번의 거역도 허락하지 않았던 저 오랜기율은, 그러나 이제 그 시효가 다한 듯 싶다. 철석같았던 우리의 믿음은, 오로지 한 명의 작가로 인하여 허물어지고 있다.천명관(43·사진). 그는 한국문학의 전제조건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작가다.
천명관의 거사는 2004년 12월에시작됐다. 그의 첫 장편 『고래』는, 소설에 관한 익숙한 규범을 조목조목 위반했다. 기승전결의 구조, 언어 조탁 따위의 문학적장치는 여기에 없었다. 변사가 이야기를 주도했고, 별 설명 없이 여자가 남자로 변신했다. 수시로 벌어지는 만화적 상황은 소설의기초 덕목인 개연성마저 무시했다. 말도 안 되는, 아니지, 소설이 안 되는 네버엔딩 스토리쯤의 글이었다. 말하자면 『고래』는,모종의 규칙을 위반하고 출전을 감행한 부정선수였다. 한데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이 정체불명의 읽을거리는 눈을 떼기 힘들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오늘, 천명관의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문학동네)가 나왔다. 책에 따르면천명관은 여전히 반역을 도모 중이었다. 특히 두 편의 단편 ‘프랑스혁명사’와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대놓고 한국문학의 경계를따져 묻고 있었다.
이 한국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유럽인의 대소사를 적어놓고 한국소설이라 우긴다. 그래서골치가 아프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 국적불명의 소설은 일종의 유행이다. 그러나 그건 공간적 배경이 특정되지 않아도 될때의 얘기다. 한국에서도 박민규가 외계인을 출연시켜 허무맹랑한 얘기를 늘어놓는다지만, 그 밑바탕엔 한국적 상황이 촘촘히 깔려있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작품은 경우가 다르다. ‘프랑스혁명사’는 19세기 영국 런던이 배경이다.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이 후배 존에게‘프랑스혁명사’ 초고의 교정을 부탁한다. 그러나 존의 하녀 위즐리 부인이 부주의로 원고를 태워 버린다. 이게 전부다. 역사를뒤져보니 토마스 칼라일은 실제로 『프랑스혁명사』(1837)를 발표했고, 존이란 후배는 『자유론』의 저자 J.S. 밀이다. 하여우리는, 이쯤에서 작가에게 외쳐야 한다. “그래서, 뭐?”
표현 방식에서도 음모의 일단이 읽힌다. 한껏 과장된번역투 문장과 우리네 정서와 무관한 디테일로 소설은 그득하다. 이를 테면 ‘그게 누군지 아세요, 토마스? 오! 그건 바로 나디아울이었어요’와 같이 간질대는 문장을 구사하는 한국작가는 근자에 본 적이 없다. ‘냉장고에 당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준비해두었어요.동 페리뇽 말에요’에서의 ‘동 페리뇽’은 보통의 한국인에게 일말의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설령 토마스 칼라일이 숙변으로고생하는 털북숭이에다 신경쇠약증 환자였다손 치더라도, 우리네 삶하곤 하등 상관없단 말이다.
21세기 벽두,한국문단엔 외계인으로 의심되는(혹은 지구인으로 둔갑하는데 성공한) 몇몇이 있다. 황병승·김록·박민규 등이 유력한 용의자다.천명관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은하계 출신이 분명하다(차에 망원경을 싣고 다니는 게 어째 수상했다). 그렇지 않다면,오늘 우리는 한국문학에 관한 오랜 관습 하나를 철회해야 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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