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피부 -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전혀 모르는 작가이긴 하지만, 신문 서평이 심각하게 마음에 들길래 사서 봤다. 서평에 의하면 제목부터도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좋아할 만한 비정하고 잔인한 하드보일드 소설!!!!!!!

...이었지만 막상 읽어 보니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처절하게 울먹이는 쪽에 가까웠다. 게다가 줄거리가 요즘 난무하는 초현실주의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을 하다 회의를 느끼고 외딴 섬에 기상관으로 온 남자가, 양서류와 인간의 혼혈 같은 괴물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매일 밤 총을 쏴 댄다는, 그런 초현실주의.

이런 비현실적인 소재를 써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게 더 쉬워 보여선지, 아니면 그저 요즘 너무 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차가운 피부>같은 경우는 너무 날로 먹으려 드는 것 같지도 않고, 인상깊은 구절들도 꽤 있고, 주제의식에도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다. 상당히 감동 받다.

속도감 있게 치고 나가는 단문이 이야기를 더 살려주었다.


- 눈이라는 것은 보는 것이지만 관찰하는 눈은 드물고, 보고 깨닫는 눈은 더더욱 드물다.

- 그녀를 잃는다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삶이 없는 죽음, 죽음 없는 삶? 어느 편이 더 견디기 힘들까? 얼음이 어는 여름, 아니면 불타는 겨울? 이런 식으로 시간의 끝까지 가는 것일까?

- 그는 떠났다. 그와 함께 등대로 사라지고 전쟁의 근원이었던 악도 사라졌다. 이제 신기루를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신기루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열정과 모든 도착증에서 벗어나 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세상의 눈꺼풀이었다.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우리는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 하늘은 군데군데 때가 묻은 듯한, 아니 그보다 더 시커먼 녹슨 갑옷처럼 우중충한 은빛이었다.  ....   물론 내 묘사는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다만 내가 본 것이 그랬을 뿐이다. 한 사람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감추어 둔 내면의 반영일 때가많으니까.



어떤 풍경을 좋아하세요?




덧글

  • 예술인생 2007/11/07 01:08 #


    어떤 느낌을 묘사하려고 할 때,
    그것이 내면의 반영이라고 해도.. 내면이 무엇인지. 어떠한 지는 스스로 잘 모른다는거.
    아는 만큼 보이는 건 아니라고 강변했던, 계절학기 미학입문 강사가 갑자기 떠오르기도하고..
    그래서 '감추어 둔' 내면이라고 한 건가? 무의식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요즘 서울 시내 걷기 좋을 듯. 낙엽 날리는 서울 거리가 보고싶군. 사진이나 찍어서 올려봐~

  • 생강 2007/11/08 23:09 #

    잘 모른다는 데 동감. 저도 제가 왜 특정한(예를 들어 좀비들이 개떼처럼 몰려나올 것 같은 음침한 들판 같은 데) 풍경을 좋아하는지 저 문장 읽고 깨달았어요.

    이 나이가 좋을 땐데, 하면서 사진 열심히 찍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워낙에 수줍음타는 성격인지라...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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