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 & 이사카 코타로 영화

먼저, 용어설명.

* 코지 미스터리 : 미스터리물이긴 한데, 누구 죽어나가는 사람도 없고 스토리도 시종일관 명랑하게 전개되는 미스터리물.
                      예를 들어 이상한 섬에 떨어진 사람에게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기지만 알고 보니 불쌍한 소년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꾸며낸 일에 불과했다든가 등등.


코지 미스터리물 작가 중 하나가 이사카 코타로다. 요즘 한국에서 한창 환영받고 있는 일본 미스터리 소설가 중의 하나. 코지 미스터리 따위는 원래 내 취향(잔인하고 무섭게!!!)이 아니라서 그냥 머리나 식히려고 몇 권 읽었는데, 꽤 괜찮았다. 온다 리쿠처럼 볼을 붉혀가면서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유머러스하고 참신한 구석이 있다.

지금껏 읽은 바에 의하면 이사카 코타로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명랑과 우울을 위태위태하게 넘나든다는 점이다. 냉소적인 걸로 독자들을 웃기는 주인공과 주변인물이 등장해서 작품 분위기가 참으로 화사하구나...하고 느낄 때쯤, 작가는 갑자기 잔혹하고 엽기적인 일화를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그건 그렇고 사지가 잘리는 고문을 당하는 기분을 네가 알아?'라고 정체불명의 남자가 호통을 친다는 식이다. 물론 이 일화는 실제 작품 내에서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주인공이나 주인공 친구가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에 불과하다. 그저 소문인 탓에 어쨌든 작품 자체는 코지 미스터리의 위상을 되찾긴 하지만, 독자들로서는 왠지 무서운 기분, 혹은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터질 것만 같은(결국은 없지만)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런 잔재주(!) 덕에 마지막 장까지 읽고픈 기분이 든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이 잔재주는 이사카 코타로만의 것은 아니다. 무서운 분위기를 내고는 싶은데 실제로 무서운 일이 발생하게 했다간 그 뒷감당이 어려울 때, 작가들은 인물들의 상상력이나 인물 간의 소문을 통해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타 작가들이 어쨌거나 살인 등등의 무서운 일들을 실제로 발생시키는 와중에 이런 잔재주를 쓴다면, 이사카 코타로는 더없이 쾌활한 코지 미스터리인 주제에 애써 묵직한 분위기를 잡으려 든다는 거다. 이런 게 오히려 더 변태스러워서, 약간의 거부감마저 들 정도다.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좀 있었으면 싶다. 썰고 자르고 부수다가 생뚱맞게 정의 운운하는 쏘우 시리즈의 직쏘도 짜증나지만 소박하게 명랑쾌활하다가 갑자기 사지절단으로 바람을 잡는 이사카 코타로도 답답하다. 인간에 대한 일관된 신념이 있으면 저런 태도는 나오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이제서야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사카 코타로 소설로 만든 영화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 역시 안절부절 못하면서 봤다. 시계가 없어도 정확하게 시간을 잴 수 있는 여자, 타인이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아는 남자 등이 나와서 시원하게 은행을 턴다는 것까진 좋다. 소박하긴 하지만 나름 스타일도 있는 편이었다. 오사와 다카오&스즈키 교카 커플 덕에 마음이 훈훈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저 영화 속 대사처럼 '로망'을 위해 솜씨 좋게 은행을 터는 주인공들을 보면 불안해진다. 은행을 턴다고 애꿏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주인공들은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은행을 털기 때문이다. 털린 은행의 은행장이 비관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려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는 장면에서도 좀체 같이 즐거워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저 신나게 보라고 만들어진 영화, 소설에 이런 딴지를 거는 건 찌질한 일일 수 있다. 아무도(최소한 대다수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두고 저질스럽다고 하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다. 하지만 이사카 코타로처럼 밝은 척은 다 해놓고 알고 보니 상당히 이기적인 건 철학의 부족이다.

그럼 이만
결론. 스즈키 교카는 예쁘다.

문인수 - 최첨단


최첨단

그래, 그것은 어느 순간 죽는 자의 몫이겠다.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꽃이 피거나 말거나, 시들거나 말거나 또 하루가 갔다.
한 삽 한 삽 퍼 던져 이제 막 무덤을 다 지은 흙처럼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룩 묻혀버린 허공처럼
하루가 갔다. 그러고 보니 참 송곳 끝 같은 이 느낌, 또 어디
싹트는 미물같다.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첨예하다.


좋구나.

....시험 전날에 뭐하는 거래!!!!!

레퀴엠을 좋아하는 이유 음악

고등학교 때 처음 음반을 산 이후,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줄곧 내 베스트다. 왜 하필 장례식용으로 죽은 사람한테나 바치는 레퀴엠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이 질문에 대해서 나름 고민도 해 봤지만 결론을 못 내고 있다가, 누가 쓴 글에서 그 결론을 찾았다.

" ...그것은 레퀴엠 앞에서 종종 실종되었던 자아를 새롭게 만났기 때문이고, 경건하고 심오한 죽음의 음악을 통해 진정한 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의 마지막 곡인 7번 합창 '이제부터 주님 품에 안겨 죽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그러나 그들은 일을 멈추고 휴식하리라'는 가사는 레퀴엠이 어떤 음악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준다. 이 세상에 죽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며 희열을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지혜의 샘이다."

그랬구나.

인물과 사상 11월호에 실린 지강유철의 글에서 데려왔음.

색, 계 영화

양조위가 평소와는 다른 역할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더 감사를 표하고 싶어진다.

온갖 영화평에서 하도 베드씬, 베드씬 해대길래 도대체 왜 그런가 했는데, 그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정말 야하다, 이런 생각은 안 든다. 대신 처절하고 슬프다. 앞서 양조위와 탕웨이가 서로 유혹하는 과정에서 에로틱한 긴장이 팽팽하게 흘러넘쳤다면, 베드씬에서는 두 인물이 각자 안고 있는 고독과 불안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제목이 뜻하는 lust와 caution이 어찌나 잘 묘사가 되었는지,긴장감에 숨이 막히다가도 베드씬에선 눈물이 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둘은 그저 슬플 뿐이다.

그 슬픔의 9할은 시대 때문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머지 1할에 더 눈이 간다. 시대가 아니었더라도, 그 둘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희미한 계기를 잘도 잡아채서 자꾸만 자신을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는 사람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이란, 참 슬퍼 보일 때가 많다는 생각을 했다. 웃든, 울든, 모든 걸 남김없이 드러내는 그 시간들이, 특히 지나고 나서는 더더욱.

양조위의 살짝 젖은 눈매가 한참이나 내 머릿속을 헤집을 듯하다.

리움미술관 '한국미술-여백의 발견'展

충분히 근거가 있는 거부감(!)을 잔뜩 품고서도, 한눈에 확 꽂힌 전시라 보러 갔다. 한강진 역에 내려서 리움으로 가는 길이 그닥 편치가 않았다.  미술관  건물 자체는 돈도 많이 들인 것 같고 예쁘긴 한데,  사람들이 편하게 와서  보라고  하는 듯한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안 난다. 미술관장의 철학이 그대로 묻어나는 거라고 속으로 투덜댔다.

전시 자체는 정말 좋았다. 역시 삼성가의 미술관!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작품들이 잔뜩 있다. 김홍도, 김정희, 강희안, 백남준, 김환기, 박수근, 윤두서, 그외 국보 및 보물들. 덕분에 눈은 정말 즐거웠다. 게다가 정말 사랑스러운 작품을 두 개나 발견. 김환기의 '하늘과 땅' 하고 정광호의 '달항아리'.

'하늘과 땅'은 직접 봐야 안다. 아쉽게도 아래 사진으로는 어떻게 생겨먹은 그림인지도 잘 알기가 힘들다. 실제로는 아득한 소실점을 향해 빠져드는 느낌, 동시에 전 우주로 내 자신이 확장되는 느낌이다. 정~말 사랑스럽다.                                                                          




                                                                             < 하늘과 땅 >

'달항아리'는 구리선으로 엮은 작품. 가로 세로 2m가 넘는데, 천장에서 수직으로 조명이 내리쪼이게 되어 있어서 그 그림자가 일고여덟개씩 바닥을 장식한다.



김형경 단편집 <담배 피우는 여자>

한차례 시험 폭풍이 지나가고, 이제 좀 숨을 고르고 있다. 오랜만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슴을 적시려고 소설을 읽었더니, 감동이 철철철철~~여성스러운 문체를 싫어하는 편이지만(그렇다고 김훈 같은 문체가 좋은 것도 아님), 김형경의 경우는 그런 '흔한' 여성적인 문체가 아니다. 자기 연민에 흐느적거리며 늘어지기만 하는 그런 문체가 아니다.

- 지나가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들보다, 오늘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몸을 바꾸는 것들입니다. 몸을 바꾸며 자신을 익혀나가는 것들입니다. 바닷바람에 날리는 해당화 꽃잎이 나비처럼 바다 위를 건너갑니다. 암청색 망막 위로 선연히 찍혀오는 핏빛 얼룩들.

                                                                            김형경 단편 <지나해, 쾌청> 中

-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저 앞 모퉁이까지, 줄은 약 50m쯤 되어 보인다. 그 줄이 한사코 허물어질 듯 느껴지는 이유를 곽지형은 잠깐 생각해본다. 줄에는, 특히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줄에는 막막함 같은 것이 있다. 삶이 더이상 아름다운, 기대할 만한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줄로 꿰어 극명하게 보여주는 허망함 같은 것.

                                                                            김형경 단편 <뿌리의 세 종류> 中

The perfect drug - Nine inch nails 음악




(지금까지는)내 생애 최고의 뮤직비디오. 역시나 나인인치네일스의 음악은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보컬 등 온갖 역할을 맡고 있는 트렌트 레즈너만은 마음에 든다. 전에 샤크라가 이 뮤직비디오를 아주 허접하게 베끼는 바람에 짜증났었던 기억이 있다. 그나저나 이 뮤직비디오를 처음 본 게 중학교 때였던가, 까마득하다.

이  아찔한 love song.



Moloko - Forevermore 음악






몰로코의 노래 중에서 딱히 내 마음에 드는 게 한두 곡 뿐이기는 하지만, 이 뮤직비디오 만큼은!! 매우 사랑스럽다.

보컬 로이진 머피의 저 흐느적하는 몸짓들이 특히나.




차가운 피부 -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전혀 모르는 작가이긴 하지만, 신문 서평이 심각하게 마음에 들길래 사서 봤다. 서평에 의하면 제목부터도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좋아할 만한 비정하고 잔인한 하드보일드 소설!!!!!!!

...이었지만 막상 읽어 보니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처절하게 울먹이는 쪽에 가까웠다. 게다가 줄거리가 요즘 난무하는 초현실주의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을 하다 회의를 느끼고 외딴 섬에 기상관으로 온 남자가, 양서류와 인간의 혼혈 같은 괴물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매일 밤 총을 쏴 댄다는, 그런 초현실주의.

이런 비현실적인 소재를 써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게 더 쉬워 보여선지, 아니면 그저 요즘 너무 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차가운 피부>같은 경우는 너무 날로 먹으려 드는 것 같지도 않고, 인상깊은 구절들도 꽤 있고, 주제의식에도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다. 상당히 감동 받다.

속도감 있게 치고 나가는 단문이 이야기를 더 살려주었다.


- 눈이라는 것은 보는 것이지만 관찰하는 눈은 드물고, 보고 깨닫는 눈은 더더욱 드물다.

- 그녀를 잃는다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삶이 없는 죽음, 죽음 없는 삶? 어느 편이 더 견디기 힘들까? 얼음이 어는 여름, 아니면 불타는 겨울? 이런 식으로 시간의 끝까지 가는 것일까?

- 그는 떠났다. 그와 함께 등대로 사라지고 전쟁의 근원이었던 악도 사라졌다. 이제 신기루를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신기루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열정과 모든 도착증에서 벗어나 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세상의 눈꺼풀이었다.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우리는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 하늘은 군데군데 때가 묻은 듯한, 아니 그보다 더 시커먼 녹슨 갑옷처럼 우중충한 은빛이었다.  ....   물론 내 묘사는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다만 내가 본 것이 그랬을 뿐이다. 한 사람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감추어 둔 내면의 반영일 때가많으니까.



어떤 풍경을 좋아하세요?




고래 - 천명관


원래 시험 때면 영화든 소설이든 목이 마르기 마련.

아래 기사를 읽고 뭔가 칠팔십년대틱한 제목의 <고래>를 집어들었다가 재미있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지 가슴 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웃기는 듯 싶었더니 잔인할 만큼 처절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귀찮게 끄적여대는 듯 보이더니, 무엇보다도 뜨겁고 열정적이었다.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14> 천명관, 한국문학의 경계를 위협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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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과서가 가르치는 한국문학의 조건은 크게 세 가지다. ①우리나라 사람이 ②우리나라 사람의 생활 감정과 사상을 ③우리의 말과글로써 적어야 한다. 다시 말해 미국인의 생활에 관한 글이라면, 한국인이 한글로 썼다 해도 한국문학이 될 수 없다. 그래,적어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이 땅에 소설이란 장르가 뿌리내린 이래 한 번의 거역도 허락하지 않았던 저 오랜기율은, 그러나 이제 그 시효가 다한 듯 싶다. 철석같았던 우리의 믿음은, 오로지 한 명의 작가로 인하여 허물어지고 있다.천명관(43·사진). 그는 한국문학의 전제조건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작가다.

 천명관의 거사는 2004년 12월에시작됐다. 그의 첫 장편 『고래』는, 소설에 관한 익숙한 규범을 조목조목 위반했다. 기승전결의 구조, 언어 조탁 따위의 문학적장치는 여기에 없었다. 변사가 이야기를 주도했고, 별 설명 없이 여자가 남자로 변신했다. 수시로 벌어지는 만화적 상황은 소설의기초 덕목인 개연성마저 무시했다. 말도 안 되는, 아니지, 소설이 안 되는 네버엔딩 스토리쯤의 글이었다. 말하자면 『고래』는,모종의 규칙을 위반하고 출전을 감행한 부정선수였다. 한데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이 정체불명의 읽을거리는 눈을 떼기 힘들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오늘, 천명관의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문학동네)가 나왔다. 책에 따르면천명관은 여전히 반역을 도모 중이었다. 특히 두 편의 단편 ‘프랑스혁명사’와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대놓고 한국문학의 경계를따져 묻고 있었다.

 이 한국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유럽인의 대소사를 적어놓고 한국소설이라 우긴다. 그래서골치가 아프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 국적불명의 소설은 일종의 유행이다. 그러나 그건 공간적 배경이 특정되지 않아도 될때의 얘기다. 한국에서도 박민규가 외계인을 출연시켜 허무맹랑한 얘기를 늘어놓는다지만, 그 밑바탕엔 한국적 상황이 촘촘히 깔려있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작품은 경우가 다르다. ‘프랑스혁명사’는 19세기 영국 런던이 배경이다.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이 후배 존에게‘프랑스혁명사’ 초고의 교정을 부탁한다. 그러나 존의 하녀 위즐리 부인이 부주의로 원고를 태워 버린다. 이게 전부다. 역사를뒤져보니 토마스 칼라일은 실제로 『프랑스혁명사』(1837)를 발표했고, 존이란 후배는 『자유론』의 저자 J.S. 밀이다. 하여우리는, 이쯤에서 작가에게 외쳐야 한다. “그래서, 뭐?”

 표현 방식에서도 음모의 일단이 읽힌다. 한껏 과장된번역투 문장과 우리네 정서와 무관한 디테일로 소설은 그득하다. 이를 테면 ‘그게 누군지 아세요, 토마스? 오! 그건 바로 나디아울이었어요’와 같이 간질대는 문장을 구사하는 한국작가는 근자에 본 적이 없다. ‘냉장고에 당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준비해두었어요.동 페리뇽 말에요’에서의 ‘동 페리뇽’은 보통의 한국인에게 일말의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설령 토마스 칼라일이 숙변으로고생하는 털북숭이에다 신경쇠약증 환자였다손 치더라도, 우리네 삶하곤 하등 상관없단 말이다.

 21세기 벽두,한국문단엔 외계인으로 의심되는(혹은 지구인으로 둔갑하는데 성공한) 몇몇이 있다. 황병승·김록·박민규 등이 유력한 용의자다.천명관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은하계 출신이 분명하다(차에 망원경을 싣고 다니는 게 어째 수상했다). 그렇지 않다면,오늘 우리는 한국문학에 관한 오랜 관습 하나를 철회해야 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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